궁정동 총소리와 함께 칠십년대가 저무는 늦은 가을날 
느티나무 사이로 듬성듬성 백색 수은등이 겸연적은 듯 켜져있고 
거리에는 나무잎새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어두컴컴하고 후미진 노량진의 거리를 
뜻모를 사연도 없이 온 적이 있습니다. 
도로변 어느 움푹 블거진 골목길 선술집에서 
무뚝뚝한 주인 할머니에게 
두 서너 번 들른 적이 있는 친구녀석은 살짝 눈인사를 했고 
잔뜩 움추린 우리들은 칠이 약간 벗겨진 동그란 연탄난로에 
뺑- 둘러 앉아서 
가슴보다 더 춥고 시린 손을 비비대며 녹였습니다. 
놀면 뭐하냐는 정겨운 말이 한 번 오가고 나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래기 국물로 
두꺼비 소주병을 두어 병 개 눈 감추듯 비운 뒤에야 
삼발이 위에 얹혀진 생조기탕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고 
미군부대 신문 배달원이 살짝 던져 준 살렘담배보다 
훨씬 더 꼬스운 냄새로 
온 육신이 하-- 해 졌습니다. 
소주잔을 꺽지도 않고 한 번에 톡 털어 넣고 
약간 쭈그러진 누런 냄비에 자글자글 끓고 있는 조기탕 국물을 
따스하게 물거진 두부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 
살아있는 것이 그처럼 오지고 더할 나위없이 좋은 날로 
별로 없을 듯 했습니다. 
젓가락 장단을 치며 가을비 우산속에, 슬픈 계절에 다시 만나요. 
이름 모를 소녀와 하얀 나비를 
누군가가 가슴으로 껴안 듯 불렀습니다. 
술잔을 주고받고 받고 주는 사이 술익는 분위기는 타올랐고 
문뜩 술잔 속에 있어 보인 듯한 
하양고 동그라한 얼굴이 어른거리면서 
뜬금없는 외로움이 먹물 번지듯 어깨쭉지에 엄습해 오자 
망각용 아스피린을 먹듯 소주를 꿀걱 들이켰습니다. 
방수가 된다고 해서 제법 알아주던 로렉스 시계를 맡기고 
주인 할머니께 깍듯이 인사를 드리고 나서 마지막 버스를 탔습니다. 
꿀물처럼 달디단 수돗물로 밤새 절인 위를 말끔히 치우고 
모닝커피를 든 황태자 다방 미스리가 으싸으싸 히프작을 흔들고 
가는 것을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흘끔 훔쳐보면서 
노량진 역 건너편 느티나무 아래 그 선술집이 
마치 전생에서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초가집인냥 
눈에 선- 하게 떠올랐습니다. 
이것이 내가 부른 노량진 연가의 첫 대목입니다. 
-이십세기야 잘가라 1999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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