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그 자리에 있는 돌멩이가 아닌 한 수시로 움직이는 동물을
찍기엔 불가능하다. 모든 예술 작업은 모순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온갖 방법의 실험이기도 하다. 사진도 예외는 아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만큼 표현 의도와 기재의 불화는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나에겐
키 작고 카메라를 흔들리지 않게 고정할 견고한 삼각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하지만 세상에 이러한 삼각대를 만들어주는 메이커는 없다.
땅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눈높이를 낮추고 나비를 기다린다.
조금 전 동물의 배설물에 앉은 나비를 보았다. 언젠가는 다시 올
것이다. 삼각대로 인한 실패를 무수히 겪은 후에야 기존 삼각대를
대체할 방법으로 만든 것이 모래주머니이다. 카메라 밑면보다
약간 큰 헝곂 주머니에 느슨하게 모래를 넣고 봉하면 훌륭한
삼각대 대용이 된다. 모래는 무거우므로 쌀이나 다른 곡물을 넣어도
된다. 여기에 카메라를 얹어 놓고 원하는 카메라 앵글을 잡은 후
안의 내용물을 잘 추스르면 견고한 삼각대가 된다.


이렇게 만든 모래주머니 위에 카메라를 얹어 놓았고, 다시 날아올
나비를 위해 스트로보 장비를 미리 조정했다. 손으로 직접 카메라를
건드리지 않도록 셔터 릴리즈도 쥐기 편한 위치로 늘어뜨려 놓았다.
오토 포커스 기능을 해제한 렌즈의 초점은 나비가 앉을 지점에 
정확히 맞추어 두었다.

앞으로 남은 일은 나비가 찾아들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다.
소리를 죽이고 호흡도 가다듬어야 한다.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내게 말을 걸어올 사람도 없다. 바람이 간간히 불어 나뭇가지가
움직였고 바람결에 묻어온 꽃향기에 취하면 된다. 적막은 더욱
깊어져 잠이 들 것 같다. 그러나 잠들 수 없다. 그동안 나비가
찾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두시간 이상 기다렸을 것이다. 나비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아까 본 것과 같은 종이다. 돌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 나에 대한
경계를 풀고 나비는 바로 내 앞에 있는 카메라 파인더에 가득
차도록 가깝게 앉았다. 파인더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클로즈업한
나비의 색채는 무지갯빛으로 빛났고 겹눈에선 안광마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말려진 대롱 같은 입을 펼쳐 열심히 먹이를
빨았다. 두 시간 이상을 기다린 나의 정성을 나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숨을 죽이며 첫 셔터를 눌렀다. 섬광의 스트로보 불빛이 숲 속의
평형을 깨고 날카롭게 빛났다. 그 순간 한 번 멈칫한 나비는
파인더의 내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 나비의 표정은 마치 가지의 구역에 들어온 낯선 침입자를 보는
듯했다. 사실 나는 나비의 공간에 불쑥 들어간 것이 아닌가.
숨을 죽이고 다시 셔터를 눌렀다. 또 한 번의 섬광이 나비를 향해
쏘아졌다.

귀찮긴 하지만 자기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란 확신으로 나비는
또 다시 먹이 빨기에 열중했다. 나와 나비의 무레한 조우는 몇 분간
지속되었다. 긴장감으로 나의 온몸은 땀으로 뒤덮였고 상체를 
지탱하는 팔은 저려오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또 얼마나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아픈 것쯤은 얼마든지 참아 낼 수 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란 주술을 나비에게 걸며 날아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뇌까렸다.

미친 듯이, 그렇지만 조용히 촬영은 계속되었다. 몇 번을
뒤척거리며 위치를 바꾸던 나비가 갑자기 날아갔다. 파인더로
들여다보던 몇 분 동안의 시간이 마치 영원같았다. 사지가 저려오는
통증을 느끼며 일어나 앉았을 때 사방이 온통 노랗게 보였다.
다시 몇시간을 기다렸지만 나비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비는
단 한번만 나를 받아들인 것이 분명했다. 나는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왠지 좋은 사진이 찍혀있을 것 같았다.
그 예감은 현실이 되어 내 사진 파일에 담겨있다.

---------------- [잘 찍은 사진하나] 중에서, 2002년 윤광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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